마지막 아침, 비와 함께
2010년 4월 27일. 자전거 전국일주 52일차 아침은 비로 시작됐다. 마지막 날만큼은 맑은 하늘을 기대했지만 아침부터 비가 계속 내렸다. 처마 아래에서 텐트를 바라보며 빗줄기가 조금 약해지기를 기다렸다.
텐트와 침낭을 최대한 털어 넣고 자전거 짐을 다시 묶었다. 오늘은 야영지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짐을 싣는 동작 하나하나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평소보다 천천히 확인했다.
전국일주의 마지막 출발. 빗속에서 전국일주의 마지막 출발을 했다. 서두르지 않고 집까지 안전하게 달리기로 했다. 🌧️
빗길에서는 마지막까지 천천히
도로는 미끄럽고 시야는 흐렸다. 집이 가까워졌다고 속도를 내면 안 됐다. 교차로에서는 평소보다 일찍 브레이크를 잡고, 차량이 튀기는 물을 피해 갓길 안쪽으로 움직였다.
얼굴로 흘러내리는 것이 빗물인지 땀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잠시 멈춰 사진을 남겼다. 멋지게 꾸민 모습은 아니었지만 52일째의 나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표정이었다.
양주와 의정부, 익숙한 이름들
표지판에 양주와 익숙한 수도권 지명이 보였다. 길을 몰라 지도를 들여다보던 여행 초반과 달리, 이제는 지명만 봐도 다음 풍경이 떠올랐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페달은 가벼워졌지만 마음은 쉽게 앞서갔다.
의정부 쪽으로 들어서니 출발하던 날 지나왔던 도로가 눈에 익었다. 그때는 앞으로 펼쳐질 52일을 전혀 몰랐고, 지금은 지나온 장면이 너무 많아 한 번에 떠올리기 어려웠다.
출발할 때 지나온 길을 반대 방향으로 다시 달리자 집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선명해졌다. 출발할 때의 도로가 오늘은 귀환로가 됐다.
익숙한 교차로가 결승선이 되다
아파트와 상가가 이어지는 익숙한 거리에 들어섰다. 비는 계속 내렸고 차량도 많았지만, 이제 남은 길을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빨간 신호 앞에 멈출 때마다 조급함을 내려놓고 마지막까지 안전하게 달렸다.
마침내 익숙한 골목에 도착해 자전거를 세웠다. 전국을 함께 돈 가방은 젖고 해졌고, 자전거에는 먼지와 수리의 흔적이 겹겹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무사히 여기까지 굴러와 준 모습이 무엇보다 멋져 보였다.
52일의 끝, 기다리던 얼굴
문을 열고 가족을 마주하자 그제야 여행이 끝났다는 실감이 났다. 길 위에서는 오늘 잘 곳과 다음 길만 생각했지만, 집에서는 나를 기다린 시간도 함께 보였다. 무사히 돌아왔다는 짧은 말이 52일의 긴 설명을 대신했다.
52일 동안 오래 남은 장면들
1일차, 의정부에서 자전거에 짐을 가득 싣고 출발했다. 모든 것이 어색했고 어디서 쉬어야 할지도 몰랐지만, 일단 페달을 밟고 집에서 멀어지는 것으로 전국일주가 시작됐다.
4일차에는 차가운 물로 씻는 일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고, 5일차에는 크게 다칠 뻔한 순간을 겪었다. 여행 초반부터 길은 만만하지 않았지만, 조심해야 할 이유와 혼자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빠르게 배웠다.
11~12일차 대전에서는 낯선 사람들에게 뜻밖의 도움과 따뜻한 대접을 받았다. 목적지보다 사람의 마음이 더 오래 기억에 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구간이었다.
18일차 해남에서 오래 남을 마음을 받았고, 19일차에는 땅끝을 향해 달렸다. 20일차 완도에서는 부모님과 두 번째로 만났다. 멀리 떠나왔다는 사실과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동시에 느꼈다.
21일차 제주에 들어가 바다 앞에서 혼자 삼겹살을 구웠고, 23일차에는 자전거로 1,100고지를 올랐다. 27일차 다시 제주항으로 돌아오기까지 섬을 한 바퀴 도는 동안 바람과 오르막, 사람과 풍경이 매일 다른 얼굴로 나타났다.
29일차 제주를 떠난 뒤 다시 육지의 길이 시작됐다. 35일차 해운대에서는 여행기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났고, 36일차에는 경주에 들어섰다. 여행이 길어질수록 낯선 곳에서도 지나온 시간이 조금씩 흔적으로 남기 시작했다.
38일차에는 바닷바람과 모래에 시달렸고, 39일차 청송 가는 길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이어졌다. 계획대로 흘러간 날보다 계획이 틀어진 날에 더 많은 이야기가 생겼다.
40일차 안동에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고, 41일차에는 자전거를 세워두고 하회마을을 걸었다. 42~43일차에는 오래 기다렸던 사람들과 시간을 보냈다. 계속 달리는 것만이 여행은 아니었다.
46일차 태백에 들어선 뒤 비 때문에 47일차 하루를 쉬었고, 48일차에는 해발 1,010m 두문동재를 넘은 뒤 펑크까지 수리했다. 마지막이 가까워졌어도 산과 날씨는 끝까지 쉽게 길을 내주지 않았다.
51일차에는 서울 가까운 공원 한쪽에서 마지막 텐트를 펼쳤다. 다음 날이면 집에 도착한다는 안도감과 이 긴 생활이 끝난다는 아쉬움이 함께 밀려왔다.
돌아보면 52일은 한 번의 긴 여행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다음 날을 맞았던 쉰두 번의 하루였다.
자전거 한 대로 전국을 돌겠다는 계획은 출발 전에는 무모한 문장에 가까웠다. 하지만 하루씩 달리고, 멈추고, 고치고, 다시 출발하다 보니 문장은 실제 길이 됐다. 잘 달린 날도 있었고 겨우 버틴 날도 있었지만, 어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음 날로 이어졌다.
52일간의 자전거 전국일주, 끝.
끝까지 완벽해서 도착한 것이 아니라, 매일 생긴 문제를 그날의 방식으로 넘겼기 때문에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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