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 어색함까지 싣고
드디어 자전거 전국일주의 첫날이 밝았다. 아침 7시, 군 생활의 흔적이 아직 몸에 남아 있어서인지 알람보다 설렘과 긴장이 먼저 나를 깨웠다.
어머니가 차려 주신 아침을 든든히 먹고 출발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자전거를 챙기고, 아버지는 짐을 내려 주셨다.
자전거의 이름은 ‘꼬녕2’. 내 별명이 꼬녕1이라서, 함께 달릴 녀석은 자연스럽게 꼬녕2가 됐다.
전국일주에 필요한 짐을 모두 싣고 나니 아버지가 출발 전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 주셨다. 이제 정말 시작이다.
첫 페달을 밟자 가장 먼저 묵직한 핸들이 느껴졌다. 앞바퀴 쪽에 직접 개조한 랙을 달고 텐트와 침낭을 묶어 두었으니 가벼울 리가 없었다.
라이딩복도, 헬멧도, 짐이 잔뜩 실린 자전거도 아직은 전부 어색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쳐다볼 것 같아 괜히 자세까지 굳었다. 그래도 설렘과 긴장, 그리고 어색함을 한꺼번에 싣고 출발했다.
첫날의 목표는 양주와 고양시, 인천을 지나 강화도에 도착하는 것. 그 이후의 일정은 놀랍도록 비어 있었다. 세부 계획은 없었고, 완주만큼은 분명했다.
가장 먼저 의정부역을 찾았다. 여행의 마지막 날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짧게 인사했다.
의정부역, 다녀올게.
익숙한 의정부 시가지를 천천히 지나갔다.
의정부시청과도 작별 인사를 나눈 뒤 고양시를 향해 페달을 밟았다.
고양시까지, 모든 것이 처음
무거워진 핸들 조작은 아직 서툴렀다. 앞뒤에 실린 짐 때문인지 자전거 몸체가 가끔 비틀거리는 느낌도 들었다.
‘이러다 자전거가 부러지는 건 아닐까?’ 걱정이 앞섰다. 꼬녕2가 전국일주 내내 잘 버텨 주기를 바라며 39번 국도에 올라섰다.
첫 오르막은 생각보다 무난했다. 짐의 무게를 떠올리며 ‘초등학생 한 명을 태우고 다닌다고 생각하자’고 마음먹었다. 무릎을 다쳤다는 여행자들의 이야기가 신경 쓰였지만, 아직은 여유가 있었다.
고양시까지 16km. 숫자는 보이는데 그 거리가 얼마나 먼지는 좀처럼 감이 오지 않았다.
전역 후 자전거를 탄 기간은 고작 2주 남짓. 의정부에서 한강까지 한 번, 양주까지 두 번 다녀온 것이 훈련의 전부였다. 속도계를 달고 달려 본 것도 두 번뿐이었다.
그러니 오늘은 자전거도, 거리도, 도로도 모두 낯설 수밖에 없었다.
첫 터널, 소리는 생각보다 컸다
달리다 보니 여행의 첫 터널이 나타났다. 규모는 작았지만 오늘은 무엇이든 처음이라 새롭고 긴장됐다.
자전거 여행기에서 터널 이야기를 여러 번 읽었던 터라 그 느낌이 궁금했다. 직접 들어가 보니 자동차 소리가 벽을 타고 훨씬 크게 울렸다. 작은 터널도 자전거 위에서는 제법 위협적이었다.
귀여워 보이던 첫 터널 덕분에, 여행자들이 왜 터널을 유독 생생하게 기억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쉬는 법도 연습이 필요했다
전역 후 담배를 끊었는데, 문제는 담배를 피우지 않으니 도무지 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군대에서도 병사들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 간부를 은근히 힘들어했다.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쉬는 시간도 잘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금연하던 시절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담배를 안 피우시니 쉬는 시간도 따로 없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담배가 당길 때 쉬는 사람이었다. 담배를 끊고 나니 쉬는 방법까지 함께 잊어버린 셈이다.
일단 자전거를 세우고 멍하니 앉아 봤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담배 생각이 났다. 금연 초반의 휴식은 휴식보다 인내에 가까웠다. 😅
조금 더 달리니 낯익은 이름이 적힌 현수막이 보였다. 올림픽 메달리스트 성시백 선수를 축하하는 현수막이었다.
TV에서만 보던 선수의 고향 마을을 자전거로 지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했다.
도로 표지판을 볼 때마다 ‘혹시 자전거 진입 금지라는 뜻은 아니겠지?’ 하고 한 번씩 눈치를 봤다. 아직 모든 것이 낯설어 도로 위에서는 긴장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흰색 엘란트라의 정체
고양시 도착 표지판 아래로 어디서 많이 본 흰색 차량이 보였다. 요즘 흰색 엘란트라를 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어 ‘설마 우리 아버지인가?’ 하고 바라봤다.
정말 아버지였다. 아들이 길을 잘 찾아가는지 걱정돼 따라오셨다고 했다.
춥지는 않은지, 힘들지는 않은지 물으셨다. 첫날의 설렘이 피로보다 앞서 있던 터라 괜찮다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세월이 지나 사진을 다시 보니 옷차림이 제법 풋풋하다. 당시에는 진지했는데, 지금 보니 조금 귀엽기도 하다. 🙂
길을 잘못 들어도, 일단은 여행
고양시청을 지나 얼마쯤 달리니 계획에 없던 행주대교가 나타났다. 원래는 일산대교로 갈 생각이었으니 어딘가에서 길을 잘못 든 모양이었다.
어차피 한강을 건너는 다리 아닌가. 잠시 고민한 끝에 행주대교로 가 보기로 했다. 첫날답게 판단은 빠르고 근거는 가벼웠다.
그러다 행주산성 표지판을 발견했다. 궁금한 건 지나치기 어려운 꼬녕1, 결국 잠깐 들러 보기로 했다.
오르고… 숨을 고르고.
또 오르고… 이번에는 숨을 두 번 고르고. 😮💨
마침내 행주산성 입구에 도착했다.
주말이라 자전거를 타는 분들이 많았다. 노란색 저지를 입은 라이더들이 내 앞을 지나가며 한마디씩 건넸다.
이야, 멋지네.
훌륭하네.
아직 1일차라 칭찬이 고맙기보다 먼저 민망했다. 다시 마주치면 더 쑥스러울 것 같아 행주산성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조용히 방향을 틀었다. 지금 생각하면 꽤 소심한 퇴장이었다. 😅
다시 행주대교 쪽으로 갔지만 입구가 자동차 전용도로처럼 보여 선뜻 들어갈 수 없었다.
여기 자전거로 들어가도 되는 곳이 맞나?
결국 일산대교를 찾아가기로 하고 조용히 포기했다. 첫날부터 무리해서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여행에서 길을 잘못 드는 것보다 힘든 건, 방금 달려온 길을 그대로 다시 보는 일이었다.
알고 보니 행주대교에 들어가기 전 망설이다 지나친 길이 맞는 길이었다. 한 번 돌아본 덕분에 이제는 확실했다.
이제부터는 킨텍스 표지판만 믿고 따라가기로 했다.
일산을 지나 강화도로
길가 부대 앞에 전차가 보여 사진을 한 장 남겼다. M48A1이 맞는지는 지금도 자신이 없다. 🤔
조금 더 가자 일산호수공원 이정표가 보였다. 이야기만 들었지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어 잠시 들러 보기로 했다.
이런 공원이라면 운동할 맛이 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주말이라 사람은 많았는데 사진 속 공원은 이상하리만큼 한적해 보인다. 카메라는 가끔 현실보다 여유롭다.
멋진 일산호수공원을 뒤로하고 다시 일산대교를 향했다.
마침내 도로 표지판에 ‘강화’가 등장했다. 멀게만 느껴지던 목적지가 글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배가 고파 편의점에서 샌드위치를 사 먹었다. 여행 중 편의점 즉석식품은 빠르고 든든한 훌륭한 식량이었다.
48번 국도에 올라 다시 속도를 냈다.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페달도 조금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
남은 거리는 7km. 이제는 힘내라는 말이 제법 현실적으로 들렸다.
첫날의 목적지, 강화도
드디어 강화대교에 도착했다. 내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첫날의 증거를 남기기 위해 기념사진도 한 장 찍었다.
다리 건너편의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정체는 잘 모르겠지만, 궁금한 건 내일 확인하기로 했다. 오늘은 일단 도착이 먼저였다.
강화대교를 천천히 건넜다.
다리를 건너자 ‘어서 오십시오’라는 문구가 보였다. 맞춤법까지 반갑게 느껴질 만큼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드디어 왔구나, 강화도.
도착보다 어려운 첫 야영
구경은 나중으로 미루고 텐트 칠 곳부터 찾기로 했다. 벌써 오후 5시가 넘었다.
달리는 것도 처음이었지만, 어디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하는지 정하는 일은 더 막막했다. 그렇게 30분쯤 강화도 안을 헤맸다.
강화향교 근처에 인적이 드문 공터가 보였다. 잠시 텐트를 칠까 고민했지만 어쩐지 마음이 편하지 않아 자리를 옮겼다.
조금 더 이동하니 고등학교 앞에 적당한 공터가 있었다. 여기로 정하고 짐을 풀려는 순간, 라면을 끓일 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조금 전에 지나친 가족마트로 돌아가 3리터 생수와 소주 두 병을 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점원에게 물었다.
혹시 이 근처에 정자가 있는 공원이 있나요?
파리바게트 골목으로 들어가시면 나와요.
감사 인사를 하고 바로 이동했다.
점원이 알려 준 골목이 보였다.
골목 안으로 들어가니 정말 정자가 있었다. 옆에는 화장실도 있어 설거지와 간단한 세면까지 가능했다. 첫 야영지로는 꽤 훌륭한 명당이었다.
한 가지 변수는 놀이터에서 신나게 떠드는 중학생들이었다. 혼자 야영한다는 긴장감 때문인지 괜한 상상까지 커졌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저 놀고 있었고, 경계심만 혼자 바빴다. 첫날의 나는 아직 모든 소리에 예민했다. 😅
텐트를 쳤다. 집에서 두 번 연습한 것이 전부였는데도 손은 생각보다 익숙하게 움직였다.
텐트는 완성됐지만, 그 안에 들어가는 일은 여전히 낯설었다.
첫날에 만난 친절
라면을 끓여 먹고 짐을 정리하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다가오셨다. 텐트를 치면 안 된다는 말을 들을까 싶어 먼저 밝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식사하셨어요?
네, 방금 먹었습니다.
밥을 하시기에 따뜻한 국물이라도 가져다드리려고 했어요.
예상과 전혀 다른 말이었다. 모르는 여행자에게 따뜻한 국물을 건네려 했던 마음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감사하다는 말을 여러 번 드렸다. 첫날부터 이런 분을 만나다니, 여행이란 생각보다 사람의 마음에 가까운 일이었다.
무사히 첫날을 마친 기념으로 소주 한 병을 열었다. 안주는 참치 통조림에 쇠고기맛 비빔고추장을 섞어 만든 즉석 요리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맛은 없었다. 그냥 참치만 먹는 편이 나았다. 두 병을 샀지만 한 병만 마셨고, 남은 한 병은 정리했다.
첫날의 교훈 하나. 소주보다 안주가 중요하다.
낯선 마음을 배우다
밤 10시쯤, 잠든 텐트 밖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저기요.
네…
문을 열어 보니 자전거를 탄 남자 두 분이 서 있었다. 낮에 전국일주하는 모습을 보고 궁금해서 찾아왔다고 했다.
오늘이 첫날이에요.
어디서 오셨어요?
의정부에서 왔어요.
몇 마디를 나눈 뒤 두 분은 돌아갔다. 그런데 금세 아쉬움이 남았다. 관심을 가지고 찾아온 분들인데 내가 너무 무뚝뚝하게 대답한 것 같았다.
아직 ‘내가 전국일주를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낯설었던 모양이다. 다음부터는 길에서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따뜻하게 인사하자고 마음먹었다.
어색했지만, 무사했던 첫날
텐트 천 너머로 꼬녕2의 그림자가 비쳤다. 조금 섬뜩해 보이기도 했지만, 자전거가 바로 곁에 있다는 사실에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어색한 첫날을 마무리했다. 낯선 텐트와 낯선 침낭 안에서, 전국일주의 첫 잠을 청했다.
1일차 기록
GPS 로그: 실종
주행거리: 106.71km
평균속도: 16.1km/h
최고속도: 50.7km/h
총 주행거리: 106.71km
최초 작성: 2010. 3. 15. 09:32
블로거 이전: 2019. 6. 1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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